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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과 종의기원 그리고 진화론, 자연선택

by 솔토지빈 2017.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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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과 종의기원 그리고 진화론, 자연선택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에 불을 붙인 최초의 인물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찰스 다윈이다. 찰스 다윈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진화론자이다.

찰스 다윈은 소심한 성격이었으리라 판단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일단 벌려 놓고 비난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두려워해 자연선택 이론을 정리해 놓고 발표를 못하고 망설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간성 좋은 월리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찰스 다윈이 아닌 다른 과학자에 의해 진화론을 접했을 지도 모른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함께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킨 3대 저서 쓴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에든버러대학 의학부 중퇴

찰스 다윈은 지금 시대로 말하면 금 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위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윈은 집안은 대대로 의사집안이다. 할아버지도 의사이며 아버지인 로버트 다윈도 의사였다. 지금도 의사 집안이라면 2세를 당연히 의과대학에 보내듯이 다윈의 아버지도 다윈을 영국의 에든버러대학 의학부에 보냈다. 당시 의과대학은 수술도구도 부족하고 수술에 반드시 필요한 마취약도 개발되기 전이었다. 환자들에게 외과적 수술을 한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안 환자들은 수술을 앞두고 도망을 가거나 수술을 해야 할 병이라면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던 시대였다. 다윈은 의과대학에서 종종 실습에 참여했다. 수술실은 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피가 튀고 환자의 몸부림과 괴성이 난무하는 수술실 상황을 목격한 소심한 다윈에게는 의과대학은 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결국 다윈은 스스로 의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8461016일 하버드 대학 의과 대학생인 윌리엄 모턴(William Thomas Green Morton, 1819~1868)이 마취제를 개발했는데, 만약 다윈이 20년만 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면 어쩌면 평범한 의사로 생을 마감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에서의 생활

다윈은 집에서 실업자 생활을 하면서 들판에 나가 여러 생물을 관찰하거나 채집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다윈의 한심스러운 행동(?)을 보면서 아버지인 로버트 다윈은 너는 우리 가문의 수치다라는 말까지 다윈에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다윈의 아버지는 다윈에게 신학대학에 들어가 신부가 되기를 제안했다.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라면 의사, 신부, 법관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빽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에 1828년에 입학한다. 다윈은 대학에서 신학은 뒷전에 두고 생물학에 관심이 있었고 생물학 교수와 친하게 지낸다. 다윈의 생물학 교수는 당대 최고의 식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 (John Stevens Henslow, 1796~1861)였다. 다윈에게는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당시에는 멀리 떨어진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편지였는데 생전에 편지쓰기의 대가인 다윈은 헨슬로 교수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헨슬로 교수도 편지를 통한 연구 활동을 많이 한 학자이기도 하다. 1831년에 헨슬로 교수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식물원을 개설했다. 그리고 다윈을 식물학작이자 박물학자의 길로 인도하고 과학적 탐구 방법을 가르치고, 친구가 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교수와 학생 사이기는 했지만 나이 차이는 10살에 불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학문적으로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거의 식물원에서 살 다시피하면서 껌 딱지처럼 붙어 다녀 다른 학생들에게도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비글호 승선

183122세에 다윈에게는 생물학자로의 길을 다지게 하는 제안을 받게 된다. 영국의 해군 측량선인 비글호 선장인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 1805~1865)가 비글호에 승선할 박물학자를 찾고 있었다. 헨슬로 교수와 친분이 두터운 피츠로이 선장은 헨슬로 교수에게 박물학자를 추천했다. 헨슬로 교수는 자신의 아내의 동생인 레너드 제닌즈를 추천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닌즈가 승선할 수 없게 되자 헨슬로 교수가 직접 승선하려고 했다. 그러나 헨슬로 교수의 아내가 임신하자 대신 다윈을 소개했다. 다윈에게는 행운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너무나 기뻐한 다윈은 자신의 승선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당시에는 배에 승선하여 탐험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는 일이다. 금 수저 집안에서 자식이 위험한 항해를 한다고 하는데 반대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고 다윈의 고집을 꺽기도 힘들었던 다윈의 아버지는 다윈에게 믿을 만한 사람의 추천이 있다면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다윈은 외삼촌을 찾아가 자신의 지지자가 되어주길 간청했고 외삼촌은 다윈의 아버지에게 비글호 승선이 앞으로 다윈이 목회 활동을 하는데 큰 힘 이 될 거라는 얘기로 다윈의 아버지를 설득하고 비글호에 승선하게 된다. 나중에 외삼촌은 다윈의 장인이 되었다.

 

 

갈라파고스제도 탐사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갈라파고스제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탐사하였다. 갈라파고스제도에서는 환경이 다른 환경에서 같은 계통의 동식물들이 사소한 변이(變異)를 관찰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서 다윈은 진화적인 사상을 갖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헨슬로는 비글호를 타고 여행하고 있는 선상의 다윈을 격려하고 그가 보내오는 자료와 편지를 영국 과학계에 소개하기도 했다. 헨슬로의 이러한 활동 덕분에 1836년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다윈은 영국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다윈은 탐사를 하면서 모아온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비글호 항해기로 출판하였고 진화론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워낙 금 수저 집안이다 보니 다윈은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연구에만 몰두 할 수 있었다. 특히 10여년을 거의 따개비 연구에만 몰입할 정도로 한 분야에 강한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월리스의 편지

다윈은 진화론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고도 20여년을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소심한 성격인 그가 종교계의 비난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심한 사람이 아니더라고 진화론은 당시 종교계에서 강하게 믿고 있는 신의 섭리에 의한 창조론에 반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또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 같은 같은 큰 파장을 몰고 올만한 사건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다윈에게는 머리가 폭발할 만큼이나 큰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185838, 당시 영국의 영토였던 싱가포르를 향하여 출항하는 우편선에 받는 사람이 찰스 다윈인 편지가 실리고 그 편지는 3개월 후 런던 교외의 다윈에게 도착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가난한 박물학자인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였다. 그 편지에는 진화론과 관련된 이론이 다윈이 생각한 이론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쓰여 진 소논문이 동봉되어 있었다. 소논문과 함께 동봉된 편지의 내용을 풀어서 말한다면 이러했다.

선생님! 제가 여러 나라를 항해하면서 동 식물에 대해 관찰한 내용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검토해보시고 이론적으로 타당하다면 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논문의 제목은 변종이 원시형에서 무한히 멀어져 가는 경향에 대하여였다. 소논문의 주된 내용은 찰스 다윈이 오랜 시간 연구해서 얻어낸 자연선택설이었다. 발생된 변이 가운데 자연환경에 적응한 것이 살아남아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라는 주장이 담겨있었다.

다윈은 동봉된 소논문을 읽어보면서 자신의 생각보다 더 정교하고 잘 정리된 글을 보면서 공항 상태에 빠졌다. 한 동안은 그는 아내인 엠마에 조차도 말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간을 보냈다. 다윈의 입장에서는 월리스에게 소논문을 발표할 기회를 준다면 20년이 넘게 연구한 자신의 연구업적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그 소논문을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에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친구인 찰스 라이엘과 식물학자 후커 박사로부터 조언을 받고 185871일 린네 학회 총회에서 다윈은 월리스와 공동발표를 하기로 준비한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까 발표장에 두 사람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 다윈은 자신의 아이 간병으로 그리고 월리스는 여행 중이어서 편지를 공동발표일이 지난 후에 받게 되어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월리스에게 기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왜 논문을 직접 발표하지 않았나요?”

월리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력도 없는 일개 곤충 채집가의 논문에 누가 관심이나 주었겠습니까. 겨우 완성된 추론으로 볼 정도였겠지요. 다윈 선생님의 진화론에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정말 인간성이 너무 좋은 월리스이다. 그는 다윈이 죽을 때까지 다윈의 곁에서 다윈의 연구를 도왔던 인간성 좋은 학자로 남게 된다.

 

 

 

종의 기원 발표

월리스의 편지를 받고 1년 후인 18591124일 다윈은 자료를 정리하여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원숭이 논쟁의 서막을 알린다.

소심한 성격의 다윈은 종의 기원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서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1판에서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한 자연 선택론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은 과학자와 신학자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초판의 정가가 노동자의 주급 수준인 15실링이었음에도 1259부는 출판된 첫날 모두 팔렸다. 다음해 1월 발간된 3000부도 나오자마자 매진되었다. 6판인 최종판이 1872년에 나올 때까지 9750부가 팔렸으며 다윈이 자서전을 쓰던 1876년까지 무려 16000부가 팔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초베스트셀러였다.

 

종의 기원의 핵심인 자연 선택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자연선택을 이렇게 정의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유리한 점을 가진 개체는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기능성이 크다. 한편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해로운 변이는 엄격하게 제거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이로운 변이는 보존되고 해로운 변이는 배제되는 일을 가리켜 자연선택이라고 부른다.”

종의 기원의 핵심이기도 한 자연 선택의 조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생명체는 높은 번식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제한하는 특별한 요소가 생기지 않는 한 그 수는 계속 증가한다.

모든 생명체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계속 번식하여 자손의 수가 늘어나게 되면 먹이, 즉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일어난다.

같은 종에 속하는 생명체들이라도 각각 형질이 다르다 :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생명체마다 다르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형질 중 일부는 자손에게 유전된다 : 유리한 조건을 물려받은 자손이 생존에 더 유리하므로 그렇지 못한 자손들에 비해 그 수가 더 많이 늘어난다.

 

멜서스의 인구론과 다윈의 생존 경쟁

비글호 탐험을 마치고 다윈이 읽은 책이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의 인구론이다. 초판에만 나와 있는

인구는 (억제되지 않을 경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라는 구절은 인구론의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 이다. 다윈은 인구론을 읽고서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종의 기원이 발표되고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유용한 동식물의 종자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자연도태'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책으로 담아내느냐는 고민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런데 멜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나는 드디어 <종의 기원>을 원고지에 그리기 시작했다.”

종의 기원은 6판까지 출간되면서 조금씩 자극적인 개념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2판에서는 창조자에 의해’ 5판에서는 적자생존’ 6판에서는 변형의 유전이라는 말 대신 진화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

종의기원이 발표되고 12년 후에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다루지 못했던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이란 제목의 책을 발간한다. 이 책은 동물들이 개체가 생존하는 데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많은 특징들을 발달시킨 것은 생존이 아닌 번식을 위해서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다윈이 말하는 성 선택의 메커니즘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성내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성간 선택이다. 성내 선택은 수컷경쟁이라고도 불리며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수컷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현상을 말한다. 성간 선택은 짝짓기에 있어서 궁극적인 선택권은 거의 예외 없이 암컷에게 있기 때문에 수컷이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 미적 특징들을 발달시키는 현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동물의 세계에서 공작새를 비롯해서 아름다운 수컷을 많이 볼 수 있다.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은 성간 선택 때문에 종의 기원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영국 신사들에게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것은 수용할 수 있어도 여성이 남성을 선택한다는 성간 선택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다.

 

 

영원한 동반자 엠마

다윈은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을 쓰면서 아내 찰스와 엠마에 대한 고마움을 더욱 느꼈다고 한다. 찰스와 엠마는 외삼촌의 딸인 동감내기 외사촌이다. 엠마는 상단한 미인이었으며 다윈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다윈의 생각을 존중해줬다. 또한 엠마는 아주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독서를 좋아하는 지적인 여성이었기에 종의 기원원고를 세심하고 읽으면서 과학계와 당시 사회에 미칠 파장들을 다윈과 함께 고민했다. 엠마는 평생을 다윈 옆에서 그가 균형을 유지하고 학자뿐만 아니라 대중도 설득할 수 있는 언어로 학문을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게 도와주었다.

 

다윈은 대중적인 커뮤니케이터는 아니었다. 종의 기원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에서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던 다윈을 대신해서 다윈의 열광적인 지지자인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나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 1817~1911)같은 사람들이 다윈을 대신하여 이런 논쟁에서 격렬하게 맞섰다.

종의 기원을 출간하고 다윈은 상당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았던 걸로 보인다. 심계항증, 두통, 복통, 음식 알레르기와 함께 죽을 때까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1882419일에 다윈은 사망했는데, 진화론자임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는 웨스트민스트성당 사원에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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